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저고여 피살 사건 (문단 편집) === 용의국가 3: [[동하]]([[포선만노]]) === 또 하나 떠오르는 용의자는 바로 [[동하]]의 포선만노이다. 본래 포선만노가 세운 동하란 나라는 거의 몽골의 위성국가나 다름 없었던 나라였다. 애초에 본래 이 나라의 이름은 대진(大眞)이었고 요령성 요양에서 세운 나라였는데 몽골 제국의 공격을 받고 동쪽으로 쫓겨나 동진(東眞) 혹은 동하(東夏)라고 부른 것이다. 그 때문에 포선만노는 급 쭈그리가 되어 몽골이 하라는 대로 하던 하수인 노릇을 했다. 그런데 1221년에 [[칭기즈 칸]]이 [[호라즘]]으로 원정을 떠나면서 지금의 [[중앙아시아]] 일대와 [[러시아]] 지역의 소국들을 정복하느라 한 몇 년을 돌아오지 않자 슬그머니 배반을 계획하게 된다. 그리하여 포선만노는 1224년 1월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 수교를 제안했다. 즉, 칭기즈 칸은 현재 먼 외국에 나가 있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고 대신 국정을 돌보고 있는 테무게 옷치긴은 탐욕스럽고 포악한데다 덕이 없는 자라 우호 관계를 끊었으니 우리끼리 서로 잘 지내보자며 동하는 청주(靑州)에 고려는 정주(定州)에 교역소를 설치해 이전처럼 교역을 하자는 것이었다. 말이 수교 제안이었지 사실상 고려와 몽골 사이에 끼어서 이간질하려는 짓거리였다. 하지만 고려 입장에선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우선 몽골의 눈치를 안 볼 수 없었던 데다 결정적으로 동하란 나라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작자들이었다. 본래 동하란 나라는 몽골 제국의 위세에 [[호가호위]]하여 고려를 상대로 행패를 부렸던 나라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끼리 서로 힘을 합쳐서 몽골이랑 같이 맞서자고 하는 걸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고려는 이런 동하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1225년 음력 1월에 이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동하는 이 사건이 있고 불과 7개월이 지난 1225년 8월부터 1229년까지 4년여에 걸쳐서 틈나는 대로 고려를 침략하였다. 이런 점을 볼 때 저고여 피살 사건은 동하 측에서 자국의 수교 제안을 거부한 고려에 앙심을 품고 저지른 사건이었고 1225년 8월부터 1229년까지 그에 대한 보복으로 고려로 소규모 부대를 보내 노략질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 사건에 동하가 개입되었다는 의심은 이미 고려시대 당대부터 있었다. 위에서 본 고종의 국서에도 나와 있지 않은가? 또한 저고여 일행이 고려와 합의된 대로 동하의 영토를 거쳐가지 않고 금나라 파속로 일대로 간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몽골 측에서 어느 정도 동하의 배신을 눈치 챘기 때문에 사절단 보호를 위해 의도적으로 경로를 변경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